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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림일기

2026 스타트업 채용 박람회 후기(feat.그룹바이)

내가 기록하고 싶은 건 그 날의 공기다. 구직자의 열정 같은 건 꽤나 뻔한 거라서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. 입장했을 때 처음 몇 십 분 동안 멍했다. 전역 직전에 전역(예정) 장교 채용 박람회를 가보긴 했는데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14년 전 일이다. 명확한 목적이 있어서 방문한 채용 박람회는 처음이었던 것.

 

대체 부스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. 면접인가? 구직 관련해서는 스몰 토킹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. 여러 부스를 둘러보니 이미 면접처럼 진지하게 대화를 하기도 하고 커피챗처럼 캐주얼한 분위기도 발견할 수 있었다. 나는 어떤 부스에 들어가야 할까.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. 너무 절실해보이긴 싫은데, 같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.

 

'이곳은 스스로를 영업해야 곳'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는 생각을 단순하게 할 수 있었다. 연차나 경력이 어느 정도 일치되는 부스에서 괜히 말도 걸어보고 기웃거리기도 하고,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옆에서 엿듣기도 했다. 짧은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건 생각보다 연차는 중요하지 않고 지금 이 사람이 우리 회사와 핏이 맞는가? 실력이 이미 충분하거나 발전 가능성이 존재하는가? 등이 중요한 듯했다. 아 물론 5년차 이상을 원하는 곳에서는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겠지.

 

어떤 부스에서 웨이팅을 해봤다. 채용 플랫폼을 솔루션으로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. 개발자로 전향하고 나서 첫 입사한 스타텁이 채용 플랫폼을 만들려고 했었다. 첫 회사의 경험이라서 보다는, 채용 플랫폼 자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.

 

응대해주신 분은, 많은 구직자를 상대하면서 지쳐 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편안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줬다. 구체적인 상황을 더 듣고 나서는 일지에 내 이름에 별표를 했을 때 고마움을 느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. 인기가 많았던 부스이기도 했고, 나는 그저 One of Them일 테니까.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문제다.

 

새삼 느꼈다. 나를 어필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. 외모 관리도 실력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찬반이 갈리는데, 이 날 수 백 수 천에 달하는 구직자를 한 자리에서 보고 나니, 외모 관리는 실력이 맞다. 타고난 걸 말하는 게 아니다. 좋은 느낌이 우러나올 수 있도록 단정함과 좋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관리의 영역이다.

 

돌아다니면서 기억에 남았던 건 창업자들의 스피치였다. 그들은 눈빛부터 달랐다. 말을 잘하는 경우가 곧잘 보였든데 스킬이 좋다는 게 아니라 수많은 고민 끝에 남은 정제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숨이었다.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고 솔루션의 시장성이 어느 정도 검증된 경우에는 눈빛이 더 빛났던 것 같다. 좋은 의미의 자기 확신이 있었다. 빛나는 사람이었다.

 

구직자 중에도 빛나는 사람이 있다. 눈이 똘망똘망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넘치고 미래가 불확실성이 가득해도,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꿈을 꿀 수 있는 시기에서 오는 순수한 열감 같은 것. 내게도 꿈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강하던 시절이 있었다. 찬란했던 때가 있었지. 슬슬 집에 가보려고 하는 찰나, 전화가 왔다. 내 이름에 별표를 해주신 분이었다. 현장 상담이 가능하다고 해서 바로 이동했다.

 

놀랍게도 개발자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. 살짝은 면접 같은, 살짝은 커피챗 같은 하이브리드 상담이었다. 상담해주신 분은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입사해 지금은 풀스택으로 영역을 넓혔다고. 나는 풀스택으로 일한 적은 없지만, 백엔드/프론트 둘 다 가능하고,  지금 작업 중인 포트폴리오는 풀스택이며 게임 서버를 만들어보면서 OS와 가까운 CS 지식이 넓어진 것이 장점이다. 여러 언어에 대한 경험으로 적응 유연성이 좋고 동시에 본질을 더 추구하게 됐다.

프론트엔드와 백엔드 둘 중에 조금이라도 더 선호하는 분야에 대한 질문에서는 꽤나 고민했던 것 같다. 백엔드는 한 번도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프론트엔드는 2D/3D도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 수 있으니까. 개인적으로는 프론트엔드는 AI에 쉽게 대체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학습을 하면 할수록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. 바이브 코딩으로 웹 사이트나 앱이 뚝딱 나오는 시대라고 하는데, 개발자는 운전자 보다는 정비사에 가깝다. 운전을 잘한다고 해서 정비 실력이 향상되는 건 아니지. 어쨌든 프론트/백엔드 둘 다 중요하다. 모든 서비스는 인터페이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.

그 날 나눈 대화에서는 개발자 분과 공감대가 꽤 있었다. 필요하면 시간과 몸을 태워서라도 일을 처리해야 하고, 성장에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. 기분이 태도가 되는 게 얼마나 안 좋은 것인지. 그 날 내가 뱉은 말들의 디테일은 많이 날아갔지만 거짓은 없었다. 굳이 좋은 포장지에 담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. 좋은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면서 머리를 떠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. '내 커리어가 조금이라도 더 탄탄했으면', '더 나은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었다면'  나는 분명 큰 사람이었는데, 어느새 이렇게 작아졌나.

 

진행하고 있던 포트폴리오는 폐기했다. 풀스택을 지향하기로 했으면 차별화되는 클라이언트가 필요한 거지 '클라이언트 할 줄 알아요'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. 이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었다. 박람회의 입주 기업 중에 AI를 활용하지 않는 곳은 손에 꼽을 것이다.

 

학습 과정에서 만큼은 여전히 AI는 보조 도구로 사용하는 게 맞고 코드도 내 손 끝에서 완성돼야 하는 게 맞지만, 과거보다는 조금 더 많이 AI의 사용 영역을 넓혀도 되겠다는 감각이 생겼다. 열심히 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아야겠더라.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거다.

Late Christmas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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